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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씨 인생 주절주절/서른되면 달라지나요

#4. 보지 못했기에, 알지 못하기에 그것을 믿음이라 한다.

 

 

 

 

 

어릴 적,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생일 때의 일이다. 처음 고등학교를 입학하여 받는 수업은 중학교 때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수행되었던 의무 교육과는 달리 고등학교 수업에서는 교과서 외의 많은 참고서와 문제집을 필요로 했다. 입학한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각 교과 담당 선생님들께서 지정해주는 많은 책들을 구입하였다. 중학생 때와 다르게 공부의 의지를 보인 나의 학업에 부모님께서는 아낌없이 지원해주셨고, 쌓여가는 책만큼 커져가는 부담을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문제는 그 부담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상위 1, 2위를 다투던 친형에게는 여러 선생님들께서 참고서와 문제집을 제공해주었다. 아마 출판사에서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영업 목적으로 배부된 도서였을 것이다. 형과는 달리 난 모든 도서를 돈 내고 구입해야 했다. 그런 사정을 깊이 알지 못한 부모님 입장에서는 왜 유독 나만 이렇게 책을 많이 사는지 싶으셨을 것이다.

 

고등학교 첫 1학기가 마치고 방학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문제는 일어났다. 기말고사도 끝났고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을까. 국어 선생님께서는 방학 때 쓸 문제집의 진도를 미리 시작하셨다. 당연히 학기 초처럼 부모님에게 문제집을 사기 위해 용돈을 달라고 하였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거짓말하고 있네. 다른 데 쓰는 거 엄마가 모를 거 같아?"

 

너무나도 뜻밖의 한 마디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에게 화를 냈다. 그것은 '무슨 말이야 엄마, 날 믿어줘'라기보다는 '그래, 믿지 마. 그깟 책 안 사'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말로써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뒤돌아섰다. 그렇게 방학 내내 국어 시간이면 나는 늘 '책 없는 사람 뒤로 나가 서있어.'의 책 없는 사람이었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국어 시간 나의 자리는 교실 뒤 사물함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화를 내고 끝까지 책을 사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책 살 돈 몇 푼 때문이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날 믿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반항이었다.

 


 

믿음에 대해 대체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보고 듣고 믿는 것과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믿는 것.

'난 널 믿어'라는 말에서 믿음은 어떤 것에 해당할까. 내 생각엔 후자일 것이다. 물론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 믿었던 자신을 후회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사람을 믿지 못해'라는 말 또한 후자에 해당한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저 사실 확인 혹은 인지일 뿐이다.

 

믿음은 내가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것을 안 봤지만 맞을 거야'라고 하는 것이다. 참고서를 사야 한다는 날 안 믿고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확인받고 싶어 할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겪어왔을지도 모른다. '설마 걔가 그랬겠어?'처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쉽게 믿어봤을 것이고, '걔가 그렇다는데, 왜 그랬어?'처럼 가까운 사람을 의심도 해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너무나도 간사하다. 쉽게 믿고 쉽게 의심한다. 어렵게 쌓아야 하고 한 순간 무너진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날 믿지 못하고 나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더라도 날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